천사의시, 나를 찾는 여행의 계속

자기자신을 안다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깨닫게 된다. 내 고향, 성별, 키, 피부색과 같은 바뀌지 않는 데이터로는 자신이 누구인지 설명하기 부족하다. 왜냐하면 하늘이 무엇인지 말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기 때문이다. 어느 한 순간도 같은 모습이 아니고 같은 깊이 같은 넓이가 아니다. 품고 있는 구름과 흘러내리는 비 그리고 바람까지 늘 변화하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마음은 빈배와 같이 강물위를 떠다닌다. 생활을 위해 움직이는 몸과는 달리 마음만은 오롯하게 자유로운 것이다. 어린시절 세상에 품었던 의문의 상당수는 어른이 되고서 희미하게나마 그 정답지를 보여주는데 점점 짙어지는 나 자신에 대한 질문에는 답을 하기가 어려워진다.그래도 세상을 살다가는 한 존재로 나에 대한 탐험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1. 고향? 어린시절?
부산, 연제구 연산동

어릴때 고향풍경은 내게 반짝이는 도시의 모습이다.
부산시내 주택가에 자리한 단층 양옥집에서 일곱식구가 살았다. 할아버지가 6.25 전쟁에서 전사하시는 바람에 30대 꽃다운 나이에 홀로 되신 할머니와 친정엄마 아빠 그리고 나를 포함한 4형제가 한집에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는 주인집이었고 셋방까지 놓고 있는데다 마당이 있어 여름이면 물놀이도 하곤했던 기억이 있는 것 보면 부자는 아니어도 중산층 정도는 되었던 것 같다.
엄마는 한여름엔 마당에 비닐을 깔고 수영장이라고 만들어서 우리 형제들이 물놀이를 하게 해주셨고
집에는 채소 과일은 넘치게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엄마가 재래시장에서 떨이로 복숭아며 사과 등을 한상자씩 사다 주셨기 때문이 아닌가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과일을 보면 얼른 먹어야한다는 안달이 나고 천국은 온통 과일이 열리는 나무가 있는 곳이리라 내 마음대로 상상하곤 한다.
그렇다고 늘 물자가 풍족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지수가 높았던 것에 할머니와 엄마는 알뜰살뜰하게 살림을하셨다. 우리 4남매가 목욕탕을 가는날은 목욕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아무때나 흔하게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엄마는 목욕탕에서 때까지 밀어가면서 목욕을 공짜로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셨던 기억 있는데 지금생각하면 나라면 엄마처럼 할 수 있었을까 싶다. 지독하게 아끼고 아끼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친정아빠는 공기업에 다니셨는데 지금처럼 신의직장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지만 나와 형제들이 대학갈때 등록금을 회사에서 대어줄 정도로 복지가 좋은편이었다. 그럼에도 월급이 넉넉하다고 할 수는 없어서 할머니와 엄마는 투철한 절약정신 하나로 버티셨는데 할머니는 비닐봉투하나도 허투루 쓰시는 법이 없었고 엄마도 우리 4남매 배부르게 먹이려고 김치국밥처럼 마술같이 양이 늘어나는 음식들도 자주 해서 먹이셨다. 할머니와 엄마는 의기투합해서 집안에서 부업을 하기도 했는데 어떤날은 마늘까기 어떤날은 옷의 실밥뜯기였다. 고사리 손으로 우리 남매들도 뛰어들어 같이 했던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시장에 나가 고동을 삶아서 파시기도 했다. 그 시절 80년대만해도 마트보다 재래시장이 더 가까웠고 엄마따라 시장가는 것이 어린마음에 세상 좋은 유희였다. 당시 거제리 시장이라 불리던 곳에 가면 떡볶이 오뎅을 간식으로 사먹고 막장에 찍어먹는 부산식 순대와 운좋은날은 칼국수까지 먹을 수 있었다. 그때 먹었던 500원 짜리 시장 칼국수보다 더 맛있는 칼국수는 지금껏 먹어보지를 못했다. 덕분에 우리가족은 연산동을 벗어나 남산동이라고 부산 외곽에 있는 곳에 땅을 사고 2층 양옥집을 지어 이사를 하게 되었다. 한곳에서 안주하기를 바라는 할머니와 아빠를 진취적인 친정엄마가 설득해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엄마는 이사 후 땅값이 오르는걸 보시더니 작은땅을 사서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땅만 좀 많이 살걸 후회가 된다고 말하신 기억이 있는데 당시에 일종의 재테크를 하신것 같다. 멋진집을 짓느라 빚을 내고 허리띠를 더더욱 꽉 졸라매느라 할머니는 집옆 텃밭에서 온갖 푸성귀를 길러 조달하셨고 엄마는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시고 집 1층을 직접 상가로 개조해서 화장품과 옷을 팔고 나중엔 칼국수가게까지 하셨었다. 장사를 하기엔 성격이 너무 좋고 퍼주기만 할뿐이라 남는것이 별로 없었는지 몇년하시다 그만두고 세를 줘버리시고 월급받는 일을 하셔야겠다면서 50이 다된 나이에 온갖 자격증을 다 따셔서 취직을 하셨다. 그리고 지금까지 일하고 계신다. 그런 경제적인 배경이 있는지 어린시절에는 까맣게 모르고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나는 내가 얼마나 할머니와 부모님의 고군분투 속에서 유복한 환경에서 살았는지 깨닫게 되었다.

2. 어린시절 할머니와의 기억

조숙한 아이였다. 6살에 유치원에 들어갔고 그동네 최고 럭셔리한 곳이었다. 유치원복에 모자까지 쓰고 시즌별로 파티와 캠프까지했던 기억이 있다. 첫손녀라고 할머니가 나를 엄청 이뻐했다. 우리 형제들은 엄마 아빠 닮아서 모두 키가 170센티가 넘는다. 막내 남동생은 180이 넘는다. 그런데도 친할머니는 내키가 왜 동생들처럼 크지 않냐고 그렇게 걱정을 하셨다. 내 최종키가 171인데 누가 들으면 욕할지 모르겠다. 부산말로하면 애살이 참 많은 우리 할머니는 기억력도 초특급이라 무엇이든 한번 들으면 잊어버리는 법이 없고 총명한 분이었다. 내가 학창시절에 암기를 잘하는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할머니가 유전자 한 구석에 물려주신 능력 같다.
벼락치기로 100점 맞기 뭐 이런 것 말이다.
할머니가 자주 하셨던 말이 생각난다. '내가 받고 싶은대로 남에게 하면된다' ' 걷지도 못하면서 뛰려고 하지 마라' ' 받는것 좋아하지 마라 다 빚이다'
지금도 할머니가 '희야 ~ 고무신 가져온나' 하시면서 골목에서 나를 부르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유모차에 나를 눕히고 담배를 피시다가 담배재가 내 콧망울 옆에 떨어져 연하게 흉이 졌었는데 크면서 사라졌다. 세월이 약이라는 어른들 말씀이 맞다.
할머니가 담배피면 이불을 뒤집어쓰며 시위를 했던 그 시절 내 모습도 생각이난다. 한평생 청상과부로 고생하며 사셨는데 손녀때문에 마음편히 담배도 못피시고 결국엔 끊으셨다. 할머니는 또 그 시절 약이 흔하지 않았기에 가정상비약을 직접 만들어 보관하고 계셨는데 무릎이 깨지면 조개가루 같은것도 바르고 달걀물 같이 고약한 냄새 나는 것도 발랐던 기억이 있다. 그런 중에 제일 압권은 내가 유치원때 화상을 당했을때의 일이다.
나는 70년대 후반 태생인데 그시절은 슈퍼보다는 구멍가게가 동네에 한두군데 있었다. 어느 겨울 점빵안 연탄곤로위에 커다란 냄비에 오뎅이 100개쯤 꽂혀있었는데 내가 그중 1개를 사먹으려고 집어든 순간 솥을 엎어버리면서 내 오른쪽 허벅지에 뜨거운 오뎅 국물이 그대로 쏱아졌는데 가게안방에 있던 여주인이 혼비백산하여 내 허벅지에 소주를 부었다.
내 허벅지 살점은 뜯겨나가 붉은 연어살처럼 드러났다.
지금 같이 화상전문병원이 있는 시절과 달리 그 시절 병원을 가지 않고 나는 할머니가 평소에 상비로 조제해둔 감잎태운재를 화상당한 허벅지에 뿌리고 앉거나 누운채로 한달이상 집에서 치료했다. 어린마음에 유치원을 안가서 좋았고 누런 진물을 감잎태운가루가 빨아들여 상처가 꾸덕꾸덕 되는 것이 신기했다. 나에게 할머니는 진정한 연금술사나 다름없었다. 물론 오른쪽 허벅다리 전체가 화상흉터였는데 깊지가 않고 옅었다. 헐머니의 사제 치료법이 적중했으니까. 더군다나 커가면서 점점 넓은 점처럼 보이다가 20대가 되기전에 때처럼 보이다가
어느순간 화상당한 흉터가 하나도 없이 사라져서
마치 꿈을 꾼듯 말끔하다.
무더운 여름 어느날 수박 참외 사과등이 과일을 한바구니 앞에 두고 우리 4남매와 엄마가 과일파티를 벌이고 있었는데 과열양상이 되어 과일빨리 많이 먹기 대회가 되어버렸다. 나는 결국 과일이 기도로 넘어가 막혀서
웃으며 엄마에게 물을 달라고 했는데 물까지 뿜어져나와 같이 먹던 엄마와 동생들이 사색이되고 나는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발을 동동구르고 있고 아빠는 아래층 세 놓은집 아저씨가 낮잠을 주무시는데 급하게 깨워 그 아저씨 차로 나를 병원에 데려가려했는데 마침 할머니가 텃밭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을 보더니 나를 꺼꾸로 잡고 등을 치며 흔들었더니 내 옷주머니에서 50원짜리가 또르르 바닥에 굴러떨어지자 할머니는 아이고 다행이다하고 한숨돌리려고했다. 내가 과일을 급하게 먹어 기도가 막힌게 아니라 동전을 삼킨것으로 오해하셨기때문이다.
2층에서 1층으로 엄마는 거의 나를 흠씬 두들겨 패듯이 등을 때렸고 봉고에 몸을 싣기 직전에 기도에 막힌 과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의 죽을뻔한 스토리가 앞으로 세번 더 남았으니 넘 아쉬워 말길 오늘은 이만 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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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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